조금씩 선선해지는 날씨가 반가운 요즘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님?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곧바로 천재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자책과 비난에 대해, 그리고 천재성과 존귀함과 온갖 좋은 품성과 자질들에 관하여 요 며칠 동안 공부한 내용을 글로 풀어보았습니다.
자기를 회복하는 글쓰기의 방법론에 따라 몸으로 탐구하며 쓴 글을, 문장을 약간 수정하여 에세이 형식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다함께 손쉽고 빠르게 천재가 되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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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이란 가장 무용한 행위이며, 죄책감은 가장 우리를 좀먹는 감정입니다. 왕성한 생명력의 흐름을 가로막고 고갈시키는 주된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범했거나 실패를 맞이했을 때, 자책하는 것은 무용한 일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며 스스로를 찔러 피 흘리게 한다면, 나는 더욱 취약해지게 될 테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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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상황은, 쓴 맛을 봄으로써 정신차리고 제대로 노력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식으로는 풀려가지 않습니다.
물론 뜻하던 대로 풀리지 않은 데 대해 실망과 속상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건강한 피드백으로서 필요한 것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다루는 것은 자책ㅡ화ㅡ죄책감입니다.
정확히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는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우선 인정해야/발견해야 합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이 있었을 뿐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앎을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던 대로 되지 않은 속상함과 아픔을 맞이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닫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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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발견으로 이어가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그 화에 난자당해 피흘리며 웅크려 생명력을 잃어가는 일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비난은 해결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해결합니다.
발견이 해결합니다.
디스커버Discover의 감성이 필요합니다.
블레이머Blamer이기를 그치고, 디스커버러Discoverer이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셀프 크리틱Self critic, 이너 블레이밍Inner blaming만 중지되어도 내적인 복지는 놀랍도록 증진됩니다. 마음의 날씨가 일순간에 온화해집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지?"
"내가 어떤 흐름 속에 들어와 있는 거지?"
"이 경험은 무엇을 말하고 있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를 발견과 깨달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운수가 썩 좋지 않아 즉각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들과 더불어, 나는 죄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탐구자ㅡ디스커버러의 정체성으로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지도, 어깨를 움츠리지도,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르고 있지도 않습니다. 비난의 눈초리를 피해 끊임없이 도파민 중독 속으로 원더링Wandering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현상과 체험을 바라봅니다. 섬세하게 귀 기울입니다. 삶은 그에게 배움의 장으로 일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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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바로 얻지 못한다 해도 그는 적어도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무간지옥에 가까운 죄인이라는 정체성의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와서, 이런 저런 조건과 의무로 속박된 작은 자아개념 밖으로 확장되어서, 자기 자신은 대범하게 잊은 채로 현상과 함께 호흡하는 더 큰 무언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비난의 힘을 믿을 때, 우리는 작아집니다. 비난을 받음으로써도 작아지고, 함으로써도 작아집니다. 비난이 편재하는 세상을 채택했으므로, 언제든 비난받을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실수나 실패에 대한 비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해봤기에, 타인이 실수나 실패를 범했을 때 ‘의무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그를 비난하는 임무를 수행하려 듭니다.
그를 교정하고 돕기 위한 것일까요? 일면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나, 본질은 복수에 가까울 것입니다. 울분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또 한 측면으로는 두려움의 발로일 것입니다. 비난하고 지적하는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다시금 비난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는 두려운 일을 피하려는 움직임인 셈입니다.
비난은 왜 일어나는가? 현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그 원인입니다. 이분법으로 현상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현상의 복합성과 중층성과 입체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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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역동성과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로 확장해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즉 세계관을 습득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세계관의 퀄리티가 세계 인식의 퀄리티를,
현상 해석의 퀄리티를,
자아 감각의 퀄리티를,
자아 기능의 퀄리티를 좌우합니다.
인과론/원인론/선형적 사고는 교각 건설에는 좋은 프레임 워크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기에 좋은 프레임 워크는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교각이나 건물 등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깊고 광대하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놀라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프레임 워크는 입체적이고 심층적이어야 합니다.
하우투로 넘어가 볼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비난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기
* 일어나고 있는 비난을 표현하기
* 무엇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왜 비난하고 있는지, 비난의 모양을 살피기
비난의 모양을 일별했다면, 이미 비난ing 프로세스 밖으로 나와 있게 됩니다. 이제 그는 비난 없이 상황을, 사태를, 안건을, 마음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비난과 분리되어 홀가분한 탐구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연민을 경험합니다.
진정한 합리성이 드러납니다.
뜻밖의 창의성의 발휘됩니다.
멀리 보는 통찰력과, 세밀히 느끼는 감수성이 깨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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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나 자신인 천재가 됩니다.
사람 본연의 역량들, 나 역시 사람이므로 당연히 갖고 있던 탁월한 힘들이 발휘되어 갑니다.
비난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비난은 사람을 작게 바라볼 때 취하게 되는 작은 태도입니다.
칼 로저스가 말했던 다음과 같은 경구가 떠오릅니다.
"사람은 간섭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
사람은 명령을 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행동한다.
사람은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개선한다.
사람은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면 기꺼이 자기 자신이 된다."
"If keep from deddling with people, they take care of themselves.
If keep from commanding people, they behave themselves.
If keep from preaching at people, they improve themselves.
If keep from imposing on people, they become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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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나는 불성실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하지 않습니다.
나는 비루하지 않습니다.
나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다. 그렇게 오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훌륭합니다.
나는 좋습니다.
나는 유능합니다.
나는 잘 배웁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풍요롭습니다.
나는 강합니다.
나는 귀엽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존귀합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나는 지혜롭습니다.
나는 천재입니다.
이것은 믿기 위해 애처롭게 애쓰는 자기암시나 긍정적 사고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하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자 반가운 깨어남입니다.
항상 애씀없는 행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ㅡAlchemic Linguist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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