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플레이 중이던 유튜브 영상을 잠시 멈추고, 곧바로 노트 앱을 켰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그날 밤의 장면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문장은, 'ㅇㅇ와 언덕길을 오르던 이 장면이 왜 떠올랐는지 도무지 모르겠다'였습니다. 그리곤 현재 저의 몸 상태와 감정 상태를 간략히 적었습니다. 머리는 약간 무겁고, 눈이 조금 침침했습니다. 기분은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조금은 울적한 듯도 했습니다. 그대로 적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어서 적어갔습니다.
무척 친하게 지냈던 ㅇㅇ와 지금은 연락이 끊겼는데, 그리움이나 아쉬움 때문에 떠오른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저는 ㅇㅇ에게 마치 부모처럼 챙겨주고 잘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시 ㅇㅇ는 저에게 사회적, 경제적인 성취의 롤모델을 기대하고 있었고, 저 또한 그에게 그것을 주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을 수 없었죠. 그로 인해 ㅇㅇ는 제게 실망했고, 저는 스스로에게 실망했었습니다.
그렇게 실패로 끝나게 됐던 관계에 대한 아픔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일까? 라고 적고서 잠시 기다려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느꼈던 애석함이라든지, 후회라든지 하는 감정들이 별달리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제가 적은 글 중에 '부모처럼'이라는 단어가 유독 신경쓰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자동적인 연상으로, ㅇㅇ가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불평하며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에 대해 썼습니다.
ㅇㅇ의 이야기 속 부모님은,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큰 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바랐던 만큼의 높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얻지는 못하셨고, 늘 그에 대한 회한으로 자식인 ㅇㅇ에게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의 설움'을 강조하며 지위의 상승과 성공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하셨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저는 왜 이 장면이 떠올랐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 제가 시청하고 있던 영상 속 유튜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카XX 뷰는 신생 플랫폼입니다. 지금 빠르게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상위 1% 귀족처럼 독점하는 인플루언서들, 셀러브리티들 밑에서 깔아주는 구독자 하층민으로만 지내실 겁니까? 카XX 뷰에선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조회수 10만 100만을 가져가는 귀족이, 속된 말로 최상위 포식자가 이제는 여러분도 되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말을 믿고 쭉 따라와보시기 바랍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저의 머릿속에 팝업된 장면에서 추출해 낸 내러티브와, 이 유튜버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내러티브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말은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 속에서 성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이자, 동시에 타인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또한 세상을 착취당하는 천민과, 착취하는 귀족으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너, 잡아먹힐 거야, 잡아먹을 거야?
너, 피지배층으로 살 거야, 지배층이 될 거야?
너, 인플루언서가 될 거야, 그냥 구독자로 살 거야?
먹거나, 먹히거나. 짓밟거나, 밟히거나.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룰이야.
이러한 메세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으로,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확신을 담아 발화하고 있는 이 목소리가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시나요?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저는 살포시 유튜브 창을 닫았습니다.
이러한 룰이 통용되는 세상 속에서는, 결코 삶의 충만한 의미도 만족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와 컨텐츠가 더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는 것은 물론 값진 일이고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와 마인드셋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별다른 생각없이 이러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내러티브에 포섭되어 최면에 걸리거나, 마음이 오염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영향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년에서 십수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는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옷이 축축해지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는 호흡기가 타격을 입는 것처럼, 그러한 환경Atmospere에 노출될 때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저는 이어서 적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부모처럼 높은 자가 되어 호혜를 베풀겠다는 교만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부모처럼 의존하며 그를 착취하고, 그럼으로써 나 또한 착취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잡아먹히거나, 잡아먹는 이분법의 세계를 살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문득, 침침했던 눈은 다시 편해졌고, 무거웠던 머리도 어느새 개운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고 보니, 이러한 컨디션의 저하는 해당 유튜버의 영상 몇 개를 연달아 보기 전에는 없었다는 것 또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꿈이 우리 자신에게 마음이 보내오는 메세지이듯, 불시에 찾아온 기억의 조각 역시도 이렇듯 마음이 스스로에게 보내 온 전령임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심층심리학에서 꿈을 분석할 때는,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풀이할 때처럼 논리적 사고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사고가 필요하며, 이는 문학적인 감수성과 오히려 가깝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백일몽 속에 저의 지인이 등장했고, 제가 그에게 부모처럼 굴었다는 것을 연결고리로 하여 그의 부모님에게로 유비적(analogical)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그로써 그의 부모님의 목소리를 다시 기억해낼 수 있었구요.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곧 과거 저의 목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전체 그림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내러티브 (이야기 구조 : 주제의식과 목적성과 역할구조가 담겨 있는)를 이해함으로써, 저는 짤막한 꿈 해석을 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백일몽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미 자신들의 목표달성에 실패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배할 것이냐 지배당할 것이냐를 근간으로 하는 성공 게임에 몰두할 경우의 결말이, 이 꿈 속에는 이미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제게 찾아온 백일몽ㅡ팝업된 기억의 조각은 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신적 면역체계의 작동이었다고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지형과 대기와 식생, 도시 환경 등의 요소들을 앳모스피어Atmosphere라고 부른다면, 어떠한 심리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공유되는 사고형식과 정서패턴의 집합을 일컬어 사이코스피어Psychosphere라 부르는데요. |